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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기자 강민재의 역사 산책 - 독일의 과거사 청산에 대한 또 다른 시각 #4 - 독일의 과거사 청산과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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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들의 모범적인 과거사 청산이라는 기존의 민족적인 관점과는 달리, 지금까지 살펴본 독일의 과거사 청산 속에서 우리는 여러 우여곡절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60년대 전후세대를 중심으로 했던 자체적인 사회개혁운동의 영향도 있었지만 그에 못지않은 주변 국가들의 큰 압박과 미국 내에서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적극적인 움직임에 영향을 받았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블로그>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국주의를 표방한 일본

 

우리는 흔히 독일의 과거사 청산과 대비시켜 일본의 전후문제 처리에 대해 비난한다. 특히 두 국가 모두 2차 세계대전 당시 군국주의를 표방했던 전범국이었기 때문에 더 비교되기도 하다. 하지만 독일인과 일본인의 과거사 청산이라는 민족적인 측면으로 대비시키기엔 두 국가의 전후 상황은 상당히 달랐다.

 

전후 독일에서 이루어진 뉘른베르크 재판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는 도쿄 재판이 이루어졌다. 당시 전범처리와 전후 배상에 있어서 미국의 영향력이 가장 셌었는데 유럽에서의 정책과 동아시아에서의 정책은 상이한 모습을 보여준다.

 

독일이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4개국으로 분할 통치되기도 했고 피해국인 영국, 프랑스 등이 여전히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요구가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져 뉘른베르크 재판에서의 전범 청산은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동아시에서 미국이 일본에 대해 사실상 독점적인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일본의 전후 처리와 배상 문제는 전적으로 미국에 의해 진행되었고 영향력이 없었던 한국과 같은 피해국들의 입장은 전혀 반영되지 못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앞서 언급한 도쿄 재판이다.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도쿄 재판의 피고인
 

도쿄 재판에서의 주요 기소대상은 서구 연합국에 대한 전쟁행위와 관련된 범죄였을 뿐 아시아에 대한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배에 관련된 문제는 취급되지 않았다. 이는 서구의 식민지배에까지 확산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더불어 미국이 일본에 대한 점령정책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결국 천황이 면책되고 반인도적 행위에 대한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당시 시작되었던 냉전체제도 미국의 일본에 대한 관대한 처리에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과거사에 대한 책임 의식이 일본에서 성장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그 결과 소수 군부 지도자에 대한 처벌로 종식된 재판과 함께 전쟁책임 문제가 본질적으로 청산되었다는 인식이 일본 사회에 형성되었다. 거기에 더하여 원폭 피해로 인하여 오히려 피해자 의식마저 성장할 여지가 조성되었다.

 

이후 일본과 독일의 경제 성장의 환경에도 큰 차이가 있었다. 독일 같은 경우 전후 경제 부흥에 있어 주변 유럽 국가들의 교역에 크게 의존하여 과거사 청산과 배상이 필수였지만 일본 같은 경우엔 경제 부흥에 주변 아시아 피해국들이 절실하지 않았고 미국과의 긴밀한 관계를 택했다.

      

<사진 출처 : 해럴드경제뉴스> 한국전쟁 당시 폐허가 된 집

 

그리고 중국과 한국 같은 피해국들이 전후 직후 맞이한 여러 어려움(한국 전쟁 등)들로 인해 일본의 과거 행위에 대한 문제제기를 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의 과거사 처리에 대한 문제제기는 상당히 늦어지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일본의 과거사 청산에 대한 비판은 민족적인 측면으로 주로 이루어졌다. 독일과 비교하며 마치 일본인들이 야만적이기 때문에 과거사에 대한 반성이 전혀 없었다는 의식이 대부분이다. 물론 지금까지의 모든 사례들이 일본 과거사 청산에 대한 면죄부를 주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저 민족적인 측면만을 보고 평가하기에는 독일에 비해 일본은 올바른 과거사 청산을 위한 환경이 잘 갖추어지지 않았다.

 

한 나라의 역사를 평가함에 있어서 그 나라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적인 요인도 상당히 중요하다. 특히 일본의 근현대사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외부적 요인이 상당히 무시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중국과 일본이라는 강력한 국가 사이에 끼어있는 국가다. 끼어있는 국가로서 주변 국가 간의 외교관계는 국가의 생존을 좌우한다. 특히 최근 미국의 사드(THAAD) 배치문제와 중국의 불법조업 어선 등으로 한반도와 중국이 갈등을 빚고 있는 이 상황에서 일본과의 외교적 마찰은 앞뒤로 적을 만드는 복배수적(腹背受敵)이라는 국가적 위기에 봉착하게 만들 수도 있다.

 

이와 같이 그리 낙관적일 수 없는 한국의 상황 때문에도 우리는 일본과의 끝이 보이지 않는 과거사 싸움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 물론 모든 문제의 시작은 전범인 일본이지만 한반도의 생존이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결국 아쉬운 것은 한국이다.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는 첫 걸음은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 원인을 먼저 파악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독일과 비교하며 민족적인 측면으로만 가고 있는 과거사 청산에 대한 비판을 다시 생각해보자 하는 취지에서 본 글을 연재하기 시작한 것이다.

 

역사는 한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세계 모든 국가들이 모두 복잡하게 얽힌 이야기다. 따라서 우리는 좀 더 넓은 시야로 세계를 바라보고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해야 한다. 이것이 세계가 서로를 이해하고 평화를 위한 한 걸음이며 과거를 배워 현재를 이롭게 하고자 하는 역사학문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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