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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강민재의 유럽여행기 #3]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까미노(Camino)’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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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언덕을 오르는 길. 저 멀리 빰쁠로나가 보인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까미노(Camino) - 용서의 언덕을 지나 나바라의 평야지대로

- This is not a race(이건 경주가 아니야) -

 

2016106

오늘은 꼭 두 여자를 떼어놓기 위해 늦게 일어났다. 실은 물집 가득한 발과 다리 통증 때문에 그렇기도 했지만.

어제는 하루 더 지낼까 고민할 정도로 아팠지만 항상 그렇듯 아침만 되면 이상하게 걸을만 하다고 느낀다. 아침을 여유롭게 먹고 나서는 알베르게. 마음을 여유롭게 하기로 마음 먹었던 것도 잠시 평소와 다르게 얼마 안 되어 동이 트고 사람들도 얼마 없다는 것을 느끼자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물집으로 미친 듯이 아픈 발을 재촉하여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어제 산 두 지팡이가 도움이 많이 되었다. 만약 이때 이걸 안 샀다면 분명히 도중에 기타를 버렸을 것이다.

빰쁠로나는 지금까지 지나친 곳들과는 달리 꽤나 큰 도시였다. 그래서 빠져나오는 데에도 한참 걸렸다. 이 도시는 거리에서 소몰이를 하는 산 페르민(San Fermin’로도 잘 알려진 곳으로 기원전 1세기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했던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하는 유서 깊은 도시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빰쁠로나의 구시가

옛 순례자들도 걸었을 고풍스러운 중세 구시가를 지나 남쪽에서 밀고 올라오는 무슬림들로부터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거대한 쐐기모양의 성벽을 끼고 현대적인 건물들과 차들이 가득한 신시가를 통해 빰쁠로나를 빠져나왔다.

조그만 마을들을 지나 마른 잡초들이 뻗어있는 언덕들을 지나 용서의 언덕(Alto del Perdon)’을 오르기 시작했다. 물집이 잡힌 발이 너무 아파 잠시 쉬려고 나무 밑에 앉았는데 주비리에서 내 물집을 치료해주셨던 한국인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옆에 앉으셨다. 아주머니도 발에 물집이 많이 잡히셔서 고생을 많이 하고 계셨다. 그래서 물집 예방에 좋은 바셀린을 조금 덜어드리고 왔다.

언덕을 계속 오르다보니 구름이 끼어 어두웠던 하늘이 어느새 맑아지며 햇빛이 평야를 밝혔는데 밑을 바라보니 저 멀리 빰쁠로나와 그 주위로 작은 마을들과 교회의 종탑들이 보였다.

용서의 언덕 위는 굉장히 바람이 많이 불었다. 거기에 산티아고 안내서들에 자주 보이는 순례자들의 동상이 일렬로 서 있었다. 발을 말리며 쉬면서 뭔가 큰 성취감이 들었다. 아직 갈 길이 그렇게나 많이 남았는지 잠시 잊었나보다.


용서의 언덕의 순례자 동상

 

내 뒤로 내가 걸어왔던 빰쁠로나와 마을들을 뒤로한 채 앞을 보니 넓디넓은 나바라의 평야지대가 펼쳐졌다. 드문드문 조그만 마을들이 있었는데, 저 마을들 중 하나가 목적지인 것 같았다.

지금까지는 1시쯤이면 거의 목적지에 도착했었는데, 오늘은 상당히 늦어버렸다. 아직 한참 남았는데도 해가 중천이었다. 언덕을 빠르게 내려가려는데 갑자기 이번엔 무릎이 아프기 시작했다. 무거운 짐을 가지고 하도 오르락내리락해서 무리가 왔나보다. 그래도 하필 이럴 때 아프다니. 쩔뚝거리면서 내려가는데 저 위에서 할머니 한 분이 천천히 내려오셨다. 미소 머금은 얼굴로 너무 서두르지 마요.” 라고 하시며 지나치시는데 마지막으로 흘리듯 하신 말씀이 인상 깊었다. “This is not a race(이건 경주가 아니에요)” 언제부턴가 나는 이 길을 경주로 여기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일찍 도착하는 것에 신경 쓰고 뒤처지는 것에 불안해하며 여유를 잊어버린 나를 할머니께서 다시 찾아주셨다.

여유를 찾아야지 하며 천천히 가다가 무릎이 회복되자 잽싸게 걸었다. 오늘 여유 부리기엔 머리 위, 해가 너무 뜨겁다. 여유는 내일부터 부리는 걸로.

시에스타(siesta)라고 해서 스페인 사람들은 평일에도 일하다 말고 1시부터 5시까지 낮잠을 잘 수 있다. 이 날도 뜨거운 햇볕 아래 나 혼자 마을들을 지나는데 마을들이 무슨 좀비영화처럼 텅 비어서 섬뜩하기도 했다.


그렇게 도착한 마을 뿌엔떼 라 레이나(Puente la Reina)’. ‘여왕의 다리라는 뜻으로 카스티야 왕국의 산초 3세의 왕비가 순례자들을 위해 다리를 지은 마을이었다. 오늘은 너무나 힘든 관계로 다리를 보는 것은 포기했다. 마을 출구 쪽에 있다고 했다. 내일 봐야지.


시에스타로 텅 빈 뿌엔떼 라 레이나의 거리

시에스타 끝나는 것을 기다렸다가 마트에서 바게트와 치즈 살라미를 사서 샌드위치를 해먹었다. 그런데 알베르게 식당에서 아까 만났던 그 한국인 아저씨, 아주머니 일행과 한 한국인 청년이 함께 신라면을 드시고 계셨다. 함께 2차로 인근 카페에서 간단히 파스타와 와인을 먹었다.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각자 딸이 파리에서 대학 동문이라 집안이 친하게 지내게 되었고 산티아고에도 같이 오게 되었다고 하셨다. 아저씨는 한국에서 직장을 은퇴하시고 여행 중이셨고 아주머니는 파리에 이민을 가셔서 30년을 넘게 사셨는데 간호사를 하고 계셨다. 또 다른 청년은 28살 박희태 형으로 파리에서 석사를 마치고 순례길을 시작한 형이었다.

오랜만에 한국 분들과의 좋은 저녁식사를 마치고 알베르게로 돌아와 희태형과 이야기를 하는데, 형도 물집이 심하다고 치료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빰쁠로나에서 처음 본 적 있었던 브라질에서 온 루이자라는 여자애가 자기가 물집을 치료할 줄 안다고 끼어들며 희태형을 치료해 준다고 했다. 곧 루이자가 바늘과 실을 가지고 오고 다른 순례자들도 이게 뭐라고 동네사람들처럼 옹기종기 모여 지켜보면서 웃고 떠들었다. 수염도 하얀 아저씨들이 희태형 물집 보면서 웃고 장난치는데 그 속에서 천진난만한 순수함과 따뜻함을 느꼈다. 요즘 같이 개인주의가 팽배한 사회 속에서 나와 이러한 따뜻한 오지랖을 당하니 마치 동막골에 온 스미스가 된 것처럼 왠지 모를 정이 느껴졌다.

[에필로그]


용서의 언덕에서 내려다 본 나바라의 평원

시에스타 때문에 텅 비어 섬뜩한 한 마을

[다음주에 계속]

[글/사진-강민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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