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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강민재의 유럽여행기 #4]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까미노(Camino)’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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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안내해주는 석주. 누군가 위에 신발을 놓고 갔나보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까미노(Camino) - 해가 쏟아지는 나바라의 포도밭을 지나

- 후회하지 않을 선택 -

 

이틀 전, 뿌엔떼 라 레이나(Puente la Reina)를 출발해 에스떼야(Estella)에서 하루를 묵었다. 에스떼야에서도 전날의 만남을 이었다. 희태형과 함께 도착하니 한국인 아저씨 아주머니도 같은 알베르게에 계셔서 그 날 희태형이 직접 파스타와 스테이크를 만들어 상그리아와 함께 먹었다. 낮선 땅, 낮선 길에서 만난 한국 분들이라 그런지 몇 번 밖에 안 봤지만 금세 정이 들었고 편안했다. 여전히 물집이 나를 괴롭혔다. 오늘은 정말 하루를 더 쉴까 계속 고민을 해보았다. 내일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2016108

아침이 되어 아저씨, 아주머니는 먼저 나가시고 나와 희태형도 떠날 준비를 했다. 아침에도 여전히 물집은 미친 듯이 내 발목을 붙잡았다. 심지어 어제 늦게 널은 빨래가 제대로 안 말랐는데 특히 제일 중요한 양말이 마르지 않았다. 그나마 남은 양말은 얇은 패션양말이었다. 어쩔 수 없이 빨래들을 배낭에 매달고 얇은 양말을 신고 출발하게 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지금까지 굳게 믿었던 두꺼운 등산양말보다 훨씬 발에 자극이 없고 많이 아프지도 않았던 것이다. 발 컨디션이 좋아지자 주변을 바라보는 여유가 더욱 생겼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웠었나.

가는 도중 와인이 나오는 수도꼭지가 있는 수도원을 지나게 되었다. 어제부터 여기 오는 것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일찍 온 사람들이 다 마셔버렸는지 몇 방울 나오지 않아 제대로 마실 수 없었다. 아쉬웠다. 와인이 콸콸 나오는 모습을 상상했는데.


이라체(Irache)수도원의 와인이 나오는 수도꼭지

희태형과 나는 말이 굉장히 잘 통했다. 어제부터 걸어오면서 정말 많은 대화들을 했는데 놀랍게도 희태형은 현재 파리에 지내고 있는 우리 교회 형과도 파리에서 아는 사이라고 했다. 유럽이 이렇게 좁은 줄은 몰랐는데. 그 외에도 정치, 사회, 철학 같은 분야에서도 말이 잘 통했고 배울 점도 많았다. 저 멀리 거대한 절벽이 우릴 바라보고 있는 언덕과 들판들을 지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 했다.


저 멀리 절벽이 바라보고 있는 언덕 길.

오늘의 목적지는 로스 아르코스(Los Arcos)라고 하는 작은 중세도시였다. 에스떼야에서부터 22km정도였는데, 나보단 걷는 걸 좋아하는 희태형은 더 걸을까 고민 중이라고 했다. 25km도 겨우 걷는 나에게는 무리였다.

아름다운 성당이 있는 언덕 위 마을에서 잠시 쉬었다가 로스 아르코스까지 그늘 하나 없는 평원을 걸었다. 저 멀리 산이 펼쳐져있고 들판 한 가운데에는 옛 영주의 성이었는지 작은 요새같은 성 하나가 홀로 서 있었다. 햇볕이 엄청 강해서 잠시 지나가며 해를 가려주는 구름마저도 너무 고마웠다.

오후 2시쯤, 로스 아르코스에 도착했다. 아주 오래된 건물들이 이어진 거리를 지나는데 중간 중간에 포도향기가 물씬 풍기는 양조장들이 보였고, 청포도를 가득 실은 수레도 보였다. 한산했던 거리와는 달리 산타 마리아(Santa Maria) 성당 앞의 광장에는 많은 순례자들이 야외에 앉아 맥주와 와인을 즐기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거기서 아저씨를 다시 만났다. 아주머니는 병원일과 발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파리로 돌아가신다고 하셨다. 희태형은 아저씨와 함께 조금만 더 걷기로 결정했다. 여기서 7km정도 떨어진 토레스 델 리오(Torres del Rio)라는 마을이었다.


산타 마리아 성당과 광장에 서 있는 한국인 아저씨.

두 사람을 보내고 나는 청포도 한 송이를 먹으면서 고민했다. 이 도시에 애착이 잘 안가기도 했었고 두 사람과 여기서 헤어지기엔 아쉽기도 했다. 지친 몸을 이끌고 혼자 미쳤다고 속으로 계속 하면서 로스 아르코스를 떠났다. 토레스 델 리오까지 가는 길은 그늘 하나 없이 포도밭만 펼쳐진 광활한 평야지대. 두 지팡이를 추진력 삼아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끝도 보이지 않는 평야를 노래를 부르며 걷다보니 저 멀리 토레스 델 리오 전에 강 하나를 경계로 마주보는 산 솔(San Sol)이라는 마을이 보였다.

내 무게를 지탱해주던 지팡이 두 개를 가방에 짊어지고 지금까지 가방에 매달려 있던 기타를 꺼내 치면서 산 솔까지 걸었다. 역시 기타 치면서 걷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산 솔에서 바라본 토레스 델 리오

어느새 몸이 무거워졌을 무렵에 산 솔을 지나 토레스 델 리오에 들어섰다. 그리고 만나는 제일 첫 알베르게에 두 사람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들어갔더니 역시나 둘을 만날 수 있었다. 희태형은 내가 올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해서 굉장히 놀라했다. 나도 내가 30km를 이 발로 걸을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 때문에 스스로 대견했다. 샤워를 마치고 지친 몸을 끌고 아저씨와 희태형과 함께 바에서 생맥주를 하나씩 들고 나와 야외 테라스에 앉아 어느새 기울어 가는 햇빛이 비추는 산 솔을 바라보았다.

[에필로그]

 

로스 아르코스까지 가는 길. 저 멀리 가운데에서 우측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작은 성 하나가 서 있다.

 

토레스 델 리오 입성 전.

 

[다음주 계속]

[글/사진-강민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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