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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강민재의 유럽여행기 #9]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까미노(Camino)’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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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원 위에 홀로 우두커니 서 있는 나무.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까미노(Camino) - 고원 사이에 숨어있던 평안

 

20161014

부르고스를 나와 마을 몇 개를 지나면 카스티야 이 레온(Castilla y Leon)주의 가장 대표적인 지형인 메세타(이베리아 반도 중앙부에 있는 대고원)가 펼쳐진다. 누렇게 말라버린 밀밭과 자갈밭들을 양 옆에 두고 완만한 경사를 한참 걷다보면 더 이상 머릿속에 아무 생각도 남지 않게 된다. 반쪽만 까매진 얼굴도, 무거운 짐짝도, 뻐근한 무릎도 모두 흐릿해진다. 브라질의 그 유명한 작가 파울로 코엘료(Paulo Coelho)도 이 순례길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는데, 특히 이 메세타를 걸었던 것이 그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고 한다.

뜨거운 태양 아래, 벌써 며칠째 계속 되는 파란 하늘 아래 누런 밀밭이 오르내리락하다가 가끔씩 토해내듯 마을 하나가 고원 아래 그 모습을 드러냈다.


메세타 아래 저 멀리 마을 하나가 보인다.

어제 40km를 걸었던 것이 컸는지, 이제는 같이 걷는 사람들도 많이 바뀌었다. 한 번은 어떤 중년 여성이 내가 짊어진 기타를 보고, 혹시 이그나시(#1편 참고)를 아냐고 물어보았다.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라 반가운 마음에 안다고 하자, 그녀는 이그나시에게 기타를 짊어지고 길을 걷는 한국인에 대해서 들었다고 했다. 짧았던 만남이었고, 먼저 지나쳐서 같이 걸을 수는 없었지만, 나에 대한 기억을 계속 간직했던 이그나시에게 큰 감동이 일었다. 아마 이그나시는 짧은 휴가 때문에 부르고스에서 순례를 끝내고 그의 집, 바르셀로나로 돌아갔을 것이었다.

어제 40km를 걸었지만, 오늘도 만만치 않은 34km였다. 사실 원래는 부르고스에서 하루 더 지낼 예정이었던 것을 더 가는 것이라서 조금만 가려했지만, 내가 싫어하는 구스타부가 22km 정도에 있는 마을까지 갈 것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고, 큰형님과 희태형이 12km 더 가 온타나스(Hontanas)라는 마을까지 간다고 해서 조금 더 힘을 냈다. 온타나스 12km 전 마을인 오르니요스 델 까미노(Hornillos del Camino)부터 온타나스까지는 마을이 하나도 없었다. 대신 메세타 한 가운데에 수도원이 하나 있다고 했는데, 거기는 거의 대자연을 느낄 수 있는 열악한 곳이라고 했다. 사실 처음에는 이 수도원에 가려고 했지만 왠지 모르게 발걸음이 멈추지 않았다.


메세타의 오르막길. 어제 내린 비 때문에 바닥에 물이 흥건하다.

잠시 초콜릿을 먹으며 바위에 앉아 쉬고 있는데, 저기서 분명히 한국인처럼 보이는 여성 한 분이 올라오고 계셨다. 같이 동행을 하게 되었는데. 곽현이라는 누나였다. 혼자서 메세타를 오르며 거의 무아지경이었다가, 오랜만에 한국인과 같이 동행하게 되자 둘이서 한참을 떠들며 걸었다.

온타나스까지는 메세타 고원 위를 한참 걸어야했다. 문제는 이놈의 고원이 끝나지를 않았다. 저 멀리 펼쳐진 지평선 위에는 어떤 마을도 보이지 않았고, 끝없는 밀밭만이 계속되었다. 이미 어제부터 지쳐있던 몸이 서서히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곽현누나는 나에 비해서 천천히 걷고 있었는데, 하루에 거의 15-20km정도만 걷는다고 했다. 따라서 누나도 오늘은 평소보다 상당히 많이 걸어서 힘들다고 했다.

잠시 뒤, 거짓말처럼 지평선이 끝나더니 깊은 계곡 밑에 마을 하나가 나타났다. 성당 종소리가 슬프게 울리는 온나타스였다. 내가 조금 늦자 걱정이 되었는지 저 멀리 언덕 위에서 큰형님과 희태형이 기다리고 있다가 나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메세타의 지평선.

 

고원들 사이로 거짓말처럼 나타난 마을 온타나스.

 

마을 성당의 종소리가 유난히 슬펐던 이유는 오늘 성당에서 장례식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분위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곳은 유난히 한적하고 조용했다. 그렇지만 한참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지내며 지친 마음을 달래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큰형님과 희태형, 그리고 현누나와 저녁을 만들어 먹고, 와인과 햄을 가지고 마을 언덕 위로 올라갔다. 저 멀리 마을 뒤 메세타 너머로 붉게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기타까지 치니, 이런 사치가 또 없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편안함, 그리고 반가운 얼굴들. 한참동안 외국인들 틈에서 지내다보니 어느새 한국인들이 많이 그리웠던 것 같았다. 높은 메세타 사이에 숨어있는 평온한 마을, 온타나스에서 간만의 평온함을 즐길 수 있었다.

 

 

온타나스에서 지는 해.

[다음 주 계속]

[/사진-강민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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