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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강민재의 유럽여행기 #24]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까미노(Camino)’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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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 까미노 (Camino) 갈리시아의 안개를 뚫고

 

20161028

오늘 일찍 나가보자 하고 7시 반에 당차게 알베르게를 나왔다. 하지만 가로등 하나 없이 암흑에 잠긴 숲길과 목장 길들을 걸으려니 몇 걸음 가지 못하고 두 다리가 얼어버렸다. 핸드폰 불빛 외에는 아무 빛도 없는 길 한가운데, 오직 초승달과 별빛들만이 가득했다. 이따금씩 불어오는 바람에 나뭇가지들이 흔들려 을씨년스러운 소리를 내었고, 헤드라이트를 켜고 지나가는 차는 마치 나를 찾고 있는 것과도 같아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길에서 멈춰서 혹시나 다른 사람이 지나가면 같이 가볼까 생각하며 한참 있었던 것 같았다.

 

어두움에 잠겨 있는 숲길. 저 멀리 동이 트고 있다.

 

아무리 지금껏 혼자 잘 버텨왔다고 해도 한치 앞도 무엇이 있을지 모르는 어둠 가운데선 마음이 한 없이 약해졌다. 그런데 저 멀리 나무들 위로 어슴푸레 올라오는 빛을 보니 왠지 모르게 마음에 안심이 되기 시작했다. 곧 해가 떠오를 거라는 믿음으로 다시금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제야 하늘을 수놓은 많은 별들과 숲 위로 떠오른 손톱달, 그리고 풀벌레 소리들을 즐길 수 있었다.

자욱하게 깔린 안개 때문에 축축한 아침 숲들과 가로등만 켜진 채 침묵 속에 잠겨 있는 마을들을 지났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저 멀리 해가 떠오르며 사방이 환해졌다.

 

안개 속에 잠긴 목장 길.

 

팔라스 델 레이(Palas del Rei)라는 큰 마을에 도착해 카페에서 아침식사와 휴식을 취하고 멜리데(Melide)에서 점심을 먹을 생각을 하며 숲길을 걷고 있는데, 저 앞에 키가 크고 마른 남자 하나가 걸어가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그와 걸음이 맞아떨어지며 인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 친구는 굉장히 특이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비록 이전에 만났던 벵자멩도 꽤 특이했지만 이 친구도 만만치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배낭에는 깃펜 하나가 꽂혀 있었고, 알록달록한 중절모에도 역시 깃털이 장식되어 있었다. 이 깃털은 나무를 깎아 만든 투박한 지팡이에도 꽂혀 있었는데, 이건 뭐라고 해야 할까, 마치 인디언 추장의 모습과도 같았다. 손에는 불교와 천주교의 묵주, 목에는 시바신 형상의 목걸이 등등의 다양한 것들이 걸려 있어서 그의 정체를 더욱 모호하게 만들어주었다.


갈리시아 개인 주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창고의 형태. 습한 갈리시아의 특성에 맞게 땅에서 이격시킨 모습이다. 고구려의 창고 형태인 부경(桴京)과 형태와 용도가 비슷하여 굉장히 인상깊었다.

이 친구의 이름은 파비앙 뵤크(Fabian Böck), 독일에서 왔다. 그는 남다른 패션만큼 가지고 있는 철학 또한 확고했는데, 그는 평화와 사랑을 추구하는 비폭력 주의자였다. 그는 특히 사랑에 대해서 강조하며 그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을 수 있다던가, 우리 자신이 곧 신이라는 등의 말을 하며 나와 열띤 토론을 했다. 특히 그는 붐 페스티벌에 참가해 사람들과 춤을 추며 춤을 통해 무언가를 초월한 사랑들을 느꼈다고 말했는데, 나에게도 춤을 추자고 할까봐 좀 무서웠다.

둘이 한참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멜리데에 도착했다. 나는 야외 테라스가 아름다운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으려 했다. 그리고 사실 너무 대화를 많이 해서 혼자 걷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처음에는 잘 가라고 인사했는데, 갑자기 이 친구가 다시 돌아오더니 여기서 식사를 하겠다고 했다. 이 레스토랑에 채식주의자들을 위한 메뉴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햄버거와 맥주를 시키고 파비앙은 샐러드와 차를 시켰는데, 주인아주머니가 음식을 가져다주며, 둘이 메뉴가 바뀐 것 아니냐며 웃었다(보통 독일인들이 주식으로 햄버거와 맥주 같은 걸 먹고 아시아인들은 채식과 차를 많이 한다는 통념이 있어서).


멜리데의 모습.

잠시 후, 파비앙의 다른 여성 친구가 레스토랑에 왔는데, 이 친구도 굉장히 특이한 패션을 가지고 있었다. 둘이 담배와 마약의 나쁜 점들에 대해서 열띤 토론을 하고 있을 때, 인사를 하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비록 나와는 생각이 많이 다른 친구였지만 굉장히 재밌는 경험이었다.

멜리데를 빠져나와서 숲을 지나다가 당나귀 한 마리와 남자를 만났는데, 이 둘은 함께 순례길을 완주하였다며, 순례자 협회에서 나온 도장을 찍어주었다. 당나귀와 이 길을 완주한 것도 대단하기는 한데, 주인의 짐들을 가득 싣고 걸었을 당나귀가 불쌍하기도 했다.


멜리데의 숲.

남자와 당나귀.

햄누나, 희태형과 아르수아라고 하는 큰 마을에서 만나기로 했다. 희태형은 어제 좀 무리를 했는지, 오늘은 적당히 걸었다고 했다. 나는 오후 4시쯤 다 되었을 때, 마흔 살 정도 되는 한국인 형님을 만나 같이 걸었다. 이 형님은 곽현 누나와도 아는 사이었는데, 40일이라는 긴 시간을 잡고 느리게 걷고 있는 중이었다. 이 형님과는 아르수아 전에 좁은 강줄기가 아름다운 리바디소(Rivadiso)라는 마을에서 헤어졌다.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대화를 해보면서 내가 너무 여유 없이 급하게 순례길을 끝내 버렸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좁은 강줄기가 아름다운 작은 마을 리바디소.

아르수아에 도착해 희태형이 있는 알베르게로 찾아갔다. 그 알베르게는 마을 구석 쯤에 있는 개인 주택이었는데, 꽤 넓고 깨끗한 공간에 2층의 늙은 부부 투숙객 빼고는 우리 밖에 없어서 자유로웠다. 아마 지금까지 알베르게 중 최고의 조건이었다. 희태형과 맥주 한잔을 마시고 저녁에 먹을 맥주들과 와인, 피자, 고기 등을 사서 집에 왔다. 그리고 햄누나를 기다렸는데, 핸드폰이 없어서 연락도 안 되는 햄 누나가 잘 도착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8시 다 되었을 때 저녁을 준비하는데,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햄누나가 들어왔다. 이 어두운 길을 혼자 걸어온 것이다. 거의 생존 전문가 급이었다.

셋이서 하루를 마치는 저녁을 먹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며 아마 셋이서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순례길의 밤을 보냈다. 희태형은 내일 40km 이상을 걸어 바로 산티아고로 들어간다고 했다. 나와 누나는 산티아고가 내려다 보이는 몬테 도 고조(Monte do Gozo)까지 가서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 들어가기로 했다.

[다음 주에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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