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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자의 폴리&무비-"너는 존재 자체가 역모다!"…'사도'로 본 대통령과 후계자 - 박정희 부터 이명박 대통령까지…현재권력 vs 미래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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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자의 폴리&무비'는 영화로 보는 정치, 정치에 빗댄 영화 이야기다. <편집자 주>


영화 '사도'(연출 이준익)는 아버지가 아들을 쌀통(뒤주)에 가둬 죽인 비극의 가족사를 소재로 하고 있다. 그러나 주제는 '현재권력'인 절대 권력자와 '미래권력'인 후계자 간 권력투쟁이다. 두 사람은 단순한 부자관계가 아니라, 왕좌를 매개로 한 정치적 파트너였기 때문이다.

사도세자(유아인 역)는 15세부터 13년간 아버지 영조(송강호 역)를 대신해서 국정을 운영했다. 선위보다는 한 단계 낮은 대리청정이었지만 사도세자의 권력은 서열 2위로 막강한 것이었다. 사도세자는 그 힘으로 조선의 개혁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후계자가 '개혁의 아이콘'이 될수록 불안하고 불편해지는 것은 최고 권력자다.

결국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외친다. "너는 존재 자체가 역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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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11월 한일 국교수립 등을 논의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하고 귀국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귀국인사차 박정희 의장을 예방했다. 1962.11.13. <사진출처=e-영상역사관>

◆ 5·16 리더, 설계자의 20년 암투…박정희-김종필

"말년의 박 대통령은 권력의 정상에서 끊임없이 나를 주시했다. 나는 견제와 감시가 견딜 수 없어 그 울타리에서 도망쳐 보려고도 했다. 대통령은 그것마저 허용하지 않았다." 김종필 전 총리는 중앙일보에 연재 중인 증언록 소이부답(笑而不答) 67편(중앙일보 2015년 8월 7일자)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정치적 라이벌인 김대중을 제거하려 할 정도로 권력욕이 강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후계자 육성 대신 끊임없는 충성 경쟁을 즐겼다. 그러나 결국 그 중 하나인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에게 급변을 당하고 말았다.

◆ 전두환과 노태우, 그리고 장세동

노태우와 함께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대통령은 유신헌법을 버리고 7년 단임제 헌법을 만들었다. 그럼에도 "전두환 대통령은 누굴 후계자로 지목해 관리한 적이 없었다. 전 대통령의 힘이 그만큼 강했다"고 최측근이었던 허화평 전 의원은 회고했다.

그러나 임기 말인 1987년 직선제 개헌 요구가 빗발치자 전두환은 후계자를 지목해야하는 상황에 빠진다. 박정희의 최후를 기억하는 전두환은 부하인 장세동을 세워 대리청정을 하려했다. 하지만 '친구' 노태우가 충성을 맹세하고 신뢰했던 박철언 등이 이를 보증하자 받아들인다. 전 전 대통령은 그러나 결국 노태우에게 배신당하고 백담사로 쫓겨나는 수모를 겪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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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우), 노태우(좌) 전 대통령이 5ㆍ18 광주민주화운동, 12ㆍ12와 관련한 선고공판을 위해 법정에 출두했다. 1996.08.26. <사진출처=e-영상역사관>

◆ 노태우와 박철언, '승부사' 김영삼

정권 출범 특등 공신인 박철언은 '6공 황태자'로 불리며 노태우 대통령 집권 초기 승승장구했다. '물태우'로 불리며 유약한 모습을 보이던 노태우 대통령은 김영삼, 김종필과 내각제 개헌을 매개로 한 3당 합당을 통해 반전을 꾀했다. 하지만 김영삼이 킹메이커 김윤환 등 민정계를 포섭, 전당대회에서 승리하자 노 대통령은 급격히 무너졌다. 

이후 노태우 대통령은 아무런 힘도 써보지 못하고 김영삼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다. 그리고 결국 김영삼에 의해 '쿠데타 종범'으로 몰려 주범 전두환과 함께 구속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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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대통령이 1997년 12월 13일 이인제(국민신당), 이회창(한나라당), 김대중(국민회의) 등 대통령 후보들을 청와대로 초청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경제난 타개를 위해 긴밀한 협력을 당부했고, 3당 대통령 후보들은 IMF 경제위기를 정략적으로 이용하지 않고, 초당적 입장에서 협력키로 의견을 모았다. 1997.12.13. <사진출처=e-영상역사관>


◆ '마음 속의 2인자' 이인제' vs '투쟁 끝 쟁취' 이회창

김영삼 대통령은 권력을 나눌 마음이 전혀 없었다. 대신 영원한 라이벌인 김대중을 견제하기 위해 이인제를 앞세운 '세대교체론'을 공언했다. 그러나 임기 3년차에 지방선거 참패로 권력이 진짜로 흔들리자 "임기가 2년5개월이나 남은 시점에서 후계 구도 논의는 바람직하지 않다"며 후계자 논의자체를 원천봉쇄했다.

특정한 후계자가 없는 상태에서 1997년 봄 한보 사태, 아들 김현철의 비리가 터지며 권력이 바닥으로 떨어지자 이른바 '9룡의 쟁투'가 시작되며 여당은 일대 혼란에 빠진다. 결국 대선 후보 자리를 쟁취한 '대쪽' 이회창에게 막판까지 이인제를 앞세우며 버티다가 '화형식'까지 당하는 수모까지 겪으며 당에서 쫓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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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이 여야 5당 대표 및 원내대표를 조찬에 초대했다. 당시 초대된 인사들은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 김형오 한나라당 원내대표,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 김한길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권영길 민주노동당 원내대표, 한화갑 민주당 대표, 정진석 국민중심당 원내대표 등이다. 2006.10.10. <사진출처=e-영상역사관>


◆ 김대중과 노무현…공평한 경쟁 시스템 중시

여당의 지리멸렬을 틈타 'DJP 연합', 김종필과 손을 잡고 대권을 얻은 김대중 대통령은 시스템을 통한 후계자 옹립을 선언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민주당의 차기 대통령 후보는 같은 조건에서 경쟁시켜 나로부터가 아닌 국민 지지를 받는 사람이 되도록 하겠다"며 노태우 전 대통령의 심복인 김중권, 김영삼 전 대통령의 이인제를 중용했다. 동시에 노무현, 정동영, 추미애, 고건, 정몽준, 박근혜에게도 공평한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뚜렷한 후계자를 만들어내지 못하자 김대중 대통령은 역대 최초로 '차기 후보 선출 전 당 총재직 이양'을 걸고 '국민경선' 카드를 꺼내들었다. 처음 해보는 '대선후보 선출 국민경선'은 폭발적 흥행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이라는 반전을 만들어냈다.

노무현 대통령도 "차세대를 내가 만들 생각이 없다. 되지도 않는다. 당 공식 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공인된 과정을 기준으로 기회를 주는 것이 좋겠다"며 김두관, 강금실, 김근태, 정동영, 이해찬, 유시민, 정세균, 추미애 등 수많은 잠룡들이 성장할 수 있는 판을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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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청와대 단독 오찬회동에 앞서 인사를 나누고 있다. 2012.09.02. <사진출처=e-영상역사관>


◆ 현재권력과 미래권력의 불화…이명박-박근혜

당내 경선에서 겨우 박근혜를 이긴 뒤, 약체 여당 후보(정동영)를 누르고 손쉽게 청와대에 입성한 이명박 대통령은 절대 박근혜와 권력을 나눌 마음이 없었다. 박근혜 역시 '국민도 속이고 나도 속인' 이 대통령과 함께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 대통령은 김태호, 오세훈, 김문수, 원희룡, 임태희, 정두언, 남경필 등을 통한 '세대교체론'으로 라이벌 박근혜를 견재했다.

박근혜 현 대통령은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 과정에서 이명박 후보를 향해 전과14범, 위장전입, BBK 실소유주 등으로 맹공을 퍼부으며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넘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이명박은 집권 후 2008년 총선 공천에서 이른바 친박 학살을 자행했다. 살아 돌아온 박근혜 진영은 "국민도 속았고, 나도 속았다"며 이명박과의 선을 명확히 그었다.

이명박·박근혜의 권력을 둘러싼 갈등은 2009년 세종시 이전 문제를 둘러싸고 최고조에 달했다. 이명박이 "강도가 왔는데도 너 죽고, 나 죽자 하면 둘 다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고 말하자 박근혜는 "집 안 사람이 마음이 변해서 강도로 돌변하면 그 땐 어떻게 해야 하느냐"며 맞받았다. 

권력투쟁에서 '강도(强盜)'는 약과다. 영화 '사도'에서 처럼 존비속살인(尊卑屬殺人)도 비일비재하다. 마키아벨리는 1513년 '군주론'을 저술하면서 군주에게 꼭 필요한 덕목 2가지를 꼽았다. 하나는 냉혹할 정도로 인색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절대로 권력을 남과 나누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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