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그거 알아?] 충무로는 왜 영화의 메카가 되었나, 극장들 충무로 일대 밀집
기사수정

 

우리나라 영화를 상징하는 명보극장(좌), 단성사,수도극장(스카라극장 이전),중앙극장(우측 상단부터)의 모습이다. <사진제공=영화의메카 충무로 E북>
최근 서울 중구청은 명보아트홀 광장에서 '공연관광 문화융성 선포식'을 열었다. 이 선포식 골자는 명보아트홀과 서울영상미디어센터, 대한극장, 충무아트홀 등을 연계해 충무로에 '충무로 문화의 거리'를 조성하겠다는 것이다. 

 

이 같은 사업이 발표되면서 영화인들과 올드팬들은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영화의 중심이었던 충무로를 한국 문화 예술 공연의 중심으로 세우려는 움직임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90년대 전만 해도 '모든 영화의 시작은 충무로에서 시작해서 충무로에서 끝난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충무로는 그야말로 대한민국 영화의 심장이었다. 하지만 1980년대 영화사 설립이 조건이 까다롭던 등록제에서 누구나 설립할 수 있는 허가제로 바뀌고, 1990년대 후반 복합상영관이 생기며 충무로는 점차 빛을 잃기 시작했다. 

 

충무로가 예전의 명성과 영광을 잃기 시작한 것은 명보극장의 퇴락이었다. 중구청이 명보극장을 되살리기 위해 소매를 걷어 올린 것은 '명보가 살아야 충무로의 옛 명성이 되살아난다'는 절박함 때문이다.

▲명보극장 3년 연속 최다관객 


충무로에 한국영화가 부흥할 수 있었던 것은 스카라극장과 국도극장, 명보극장, 대한극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명보극장은 그 중심에 있었다. 신상옥 감독은 1961년 '성춘향'의 흥행으로 명보극장에 전속했다. 그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년), '빨간 마후라'(1964년) 등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구가하면서 충무로 일대의 상권을 촉진하는 역할을 했다. 또 '내가 버린 여자'(1978년), '속 별들의 고향'(1979년), '미워도 다시 한번'(1980년)으로 3년 연속 한국영화 최다관객을 기록하였다.

명보극장이 충무로 근방의 상징이었다면, 종로는 단연 단성사였다. 수도극장(스카라극장), 을지로의 국도극장, 종로의 세기극장, 피카디리극장이 '극장 벨트'를 형성하던 시절에 단성사는 그 벨트의 출발점이었다. 한때 한국 영화의 흥행 최고 기록을 세운 '겨울 여자'(1977년)나 '서편제'(1993년)도 단성사의 영화목록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우리나라 최초 영화관 단성사

단성사는 1907년 전통연희를 공연하던 장소에서 1910년 상설 영화관으로 개축됐다. 그리고 1934년에 단성사라는 이름으로 신축됐다. 흘려보낸 시간만큼 단성사에는 중요한 기억들이 많다. 1919년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라고 기록되는 '의리적 구투'가 개봉했다. 1926년에는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나운규의 민족영화 '아리랑'이 상영됐다. 일제 강점기였지만 우리나라 사람이 극장주로 있었던 영화관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충무로의역사2.jpg
국도극장, 대한극장(좌), 명보극장, 중앙시네마의 전성기 모습이다. <사진제공=영화의메카 충무로 E북, 신영균문화재단>

 

국도극장, 스카라극장, 중앙극장도 일제 강점기에 생겼다. 국도극장은 1913년 황금연예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했다. 그 후, 1948년 국도극장으로 개명하고 새 출범했다. 스카라극장은 1935년 와사쿠사극장으로 문을 열었다. 이후 1946년 수도극장으로 이름을 변경했고, 1962년에는 스카라극장으로 다시 개명했다. 중앙극장은 1934년 조선흥행주식회사의 재상영관이었다가 이후 1956년 개봉관으로 다시 탄생했다.

 

▲대한극장은 벤허극장


1958년 4월 대한극장이 개관했다. 한국영화 제작이 드문 시절이라 대한 극장 외화전용관으로 여겨졌다. 미국 20세기 폭스사가 설계, 감독하고 기자재까지 협조하여 만들어졌다. 뒤를 이어 8월 명보극장이 그레이스 켈리 주연의 영화 ‘상류사회’로 개관했다. 국내 최초로 냉방장치를 설치한 영화관으로 기록된다.

1960년에 세기극장과 서울키네마가 문을 열었다. 이후 1978년 합동영화사가 세기극장을 인수하며 서울극장으로 상호를 바꾸고 추가로 상영관을 확충해 개관했다. 서울키네마는 1962년 피카디리극장으로 이름을 달리했다. 그리고 1969년에 허리우드극장까지 개관하며 충무로와 종로 일대의 영화의 거리가 완성됐다.

1955년 국도극장은 '춘향전'의 흥행으로 을지로 4가 극장주변을 관객으로 붐비게 했다. 뒤이어 1956년 수도극장은 '자유부인'을 개봉해 성인 관객들을 충무로 일대로 이끌어 연일 북새통을 이루게 했다. 1962년 대한극장에서 개봉한 영화 '벤허'는 열풍을 만들었다. 서울 시민이 250만이었던 시절 무려 70만 관객을 동원했다. '벤허'를 70밀리 필름으로 볼 수 있는 유일한 극장이었다. 장장 7개월간 상영됐다. 대한극장은 '벤허 극장'이라는 애칭까지 얻었다.

원로 영화평론가 김두호(69세)씨는 "충무로 시대라고 불릴 때는 충무로에 모든 영화사가 밀집되어 있었다. 그래서 작가, 감독, 배우 등이 자연스레 모여들었다. 더불어 다방, 여관등도 성업했고, 영화와 관련된 인쇄업 등도 충무로 일대에서 성행했다. 아직도 충무로의 건물들의 외관에는 변화가 없다. 집들도, 인쇄 골목도 그대로다. 그런데 영화의 메카처럼 생각했던 60, 70년대 충무로 영화의 거리는 흔적이 없어졌다"라고 회상했다.

1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koreafrontier.com/news/view.php?idx=9071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